수많은 사건들이 결정화된 구조

2022. 1. 5. 15:28CRITIQUE

이선영(미술평론가)

2012년에 이어 올해 역시 같은 전시 부제와 작품 제목으로 정해진 ‘래프팅(rafting)’은 작가가 래프팅을 하는 기분으로 작업에 임하였음을 암시한다. 장성재의 작품은 변화무쌍한 물살에 자신을 맡겨야 하는 레포츠(extreme sports)처럼, 시시각각 다르게 다가오는 변수에 융통성 있게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다루는 재료는 물살처럼 유동적인 것이 아니다. 돌, 그것도 가장 단단한 돌인 오석이다. 오석은 검정색 정장을 차려 입은 남성이 떠오르는 돌이며, 검은 바탕에 선명하게 글을 새길 수 있어서 비석으로 많이 사용된다. 오석의 단단함과 깔끔함은 그 자체 내에 기념비성과 공식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지만, 장성재는 그것을 둥글게 굴리고 파내며, 묵직한 덩어리보다는 표면을 활성화시킨다. 오석은 바다 속에서 만들어져서 다른 돌이나 조개껍데기 등이 박혀 있곤 하는데, 작가는 이러한 잡티들을 지우지 않고 안고 간다. 그의 작품에서 필연성과 상보작용을 하는 우연성의 역할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품 외곽 부분은 연마된 내부와 구별하기 위해 불로 처리하였고, 때로 하얗게 쪼아낸 자국을 남겨둔다.

그의 작품은 재료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원초적 느낌을 생경한 인공적 도장으로 뒤덮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 가지는 한계는 명백해서, 점차 기념비성이 사라지는 현대예술에서 공간에 화려하게 펼치기 힘든 재료가 되었다. 그러나 작가는 주어진 한계를 지렛대로 삼는다. 모더니즘의 역사가 알려주듯, 한계는 동시에 그것만이 가능한 특징이 발현될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재료가 가지는 내구성과 견고성은 우연을 필연으로 도약시키고, 찰나의 순간을 영원화 하는 계기로 삼는다. 작가는 정을 노 삼아 돌을 가지고 래프팅 한다. 쇠처럼 단단한 재료를 다루는 것은 단지 재료의 저항을 이겨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관과 객관이 맡아야 할 몫을 수시로 타협해야 하는 문제이다. 전시된 작품은 대개 둥글고 외곽 부분은 돌의 자연스러운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으며, 안쪽은 숟가락으로 떠낸 푸딩 자국 같은 형상들이 구멍과 공존한다. 떠내어진 자국들은 잘 연마되어 검은색의 은은한 광택을 발한다. 반사광을 머무는 곡면들은 마치 물 표면에 햇빛이 난반사하듯이 찰랑거린다.

이 울룩불룩한 표면에다 가는 드로잉이 추가되면서, 유동하는 액체 위에 산란하는 빛의 효과가 극대화된다. 빛이나 물 같은 가변적인 현상이 단단한 돌에 그 흔적이 남겨지는 것이다. 동그랗게 자신을 말아 외곽과 구별되는 소우주를 이루면서도, 그 안쪽에 넉넉한 빈자리를 마련하는 장성재의 작품은 고체, 액체, 기체 같은 물질의 여러 현상 형태들이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자연이 어떤 현상 형태를 가지든 궁극적으로 ‘하나의 같은 재료로부터 만들어진 것’(에머슨)임을 보여준다. 그 자체의 관성을 고수하려하는 물질 덩어리를 다루는 조각가는 관성을 최대한 이용해야 거센 물살과 함께 움직이면서도 강을 건널 수 있다. 저항을 협력으로 만드는 것이다. 가령 그의 작업은 일련의 순서를 거스를 수 없다. 정확한 설계도 계산도 불가능하다. 우연과 필연이 복합된 형식으로 다소간 막연하게 시작된 작품은 최종적 결과를 가늠할 수 없다는 점에서, 노동과 생산을 넘어선다. 자연을 따르는 그의 작업은 ‘완전한 원형구조가 지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함’(아른하임)을 인식한다. 그의 작품은 정확한 중심을 지니는 기학하적 원이 아니라, 아이가 사람 얼굴 그릴 때처럼 또는 둥근 떡을 빚을 때처럼 손 가는대로 동그라미를 만든다.

동그라미 안쪽은 연마되어 있기는 하지만, 날카로운 절단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파인 무늬는 석기시대의 유물인 돌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구조와 기능의 연결은 유기체 뿐 아니라, 유기체를 모델로 만들어진 도구나 사물에도 관철된다. 모든 유기적 형태는 당면한 문제에 대해 최적의 해결책을 향한 힘이 응결된 것이다. 돌칼에서 발견될 수 있는 패턴은 자연에 새겨진 노동의 흔적이다. 재료와 제작 공정으로부터 발생한 패턴은 미술보다 더 오랜 연원을 가지는 장식의 출발이다. 그의 작품은 재료의 자연적 특질, 또는 재료의 가공에 기초한 우연적 효과의 모방이나 전개에 의해 얻어진 장식미술의 기원까지 소급된다. 바구니나 자리를 엮으면서 발달된 기술이 기하학적인 문양을 발전시킨 예는 오랜 유물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기술과 함께 생겨난 형식이기에, ‘기능에 바탕을 둔 생김새(technomorphs)’(윌레트)로 정의된다. 장성재의 작품에서 돌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연과 인공 합작의 패턴들은 시간과 공간을 잘라내는 리듬을 탑재한 또 다른 기능을 획득한다. 특히 그에게 패턴은 고정된 무늬가 아니라, 연동되는 과정의 흐름이자 흔적이다.

행위와 행위의 접점에서 형태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급류타기를 하는 듯한, 또는 ‘축구선수들이 공을 중심으로 매 순간 재배열되는 듯한 역동적 구성의 연속’(아른하임)으로 이루어진다. 자연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구조적으로 보여주는 장성재의 작품은 자연의 대상들이 그것을 조정하고 있는 바로 그 힘에 의해서 만들어짐을 보여준다. 루돌프 아른 하임은 [예술심리학]에서 대양의 파도의 모양은 충동질을 받은 물의 움직임에서 직접 나오며, 꽃은 만들어 진다기 보다는 자라나는 것이고, 그 결과 그 외관은 성장의 과정을 지각할 수 있는 효과로 성립된다고 지적한다. 장성재의 작품은 여러 자연현상 뿐 아니라, 돌을 파나가는 근육의 움직임 또한 반영되어 있다. 예술작품에 내재한 시각적 역학은 지각정보로서 받아들여질 뿐 아니라, 포함되는 힘에 대한 경험이라는 충격을 마음속에 환기한다. 그의 작품은 앞뒤로 모두 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 만큼 입체적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원판의 형태(Gestalt)를 바탕으로 한다. 그것들은 파인 정도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구멍의 형태로 인해 각각의 표정이 생겨난다.

구멍 바깥의 표면에 새겨진 가는 선 역시 표정 짓기에 한 몫 한다. 가령, 원형 안에 구멍 세 개 뚫린 작품은 마치 해골 같은 얼굴 같고, C자형의 구멍은 마치 둥근 모체(태반)에서 발생하는 생명체 같은 느낌을 준다. 또한 그 위에 새겨진 가는 선들은 형태가 발생 중에 형성되는 선처럼 분열한다. 모서리를 약간 둥글린 직사각형 작품에서 인체는 더욱 강하게 연상되는데, 지상에 우뚝 선 등신대의 높이의 조각에서 위에 뚫린 큰 구멍이 얼굴로 다가오는 것은 조각의 관례 상 분명해 보인다. 지름이 140cm 되는 둥근 작품 두 개는 마치 쌍처럼 서 있다. 작가는 굴곡 면을 따라서, 그러나 일치시키지는 않고, 단단한 재료를 조련하는 날렵한 솜씨를 발휘한다. 표면에 부가된 선들은 전시제목이나 작품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산란하는 물결무늬가 대세지만, 거기에서 떠오르는 연상들은 어디로 뻗쳐나갈지 모르는 선들 만큼이나 무궁무진하다. 출품작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둥근 형태는 기하학적으로 정확한 원은 아니지만 힘의 중심은 있다. 그것은 루돌프 아른하임이 [중심의 힘]에서 말하는 힘들의 장, 힘들이 발생하는 초점, 힘들이 수렴되는 곳으로서의 중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이 중심은 대부분 비어있다. 그것은 마치 바르트가 비유하는 도시처럼 ‘도시의 나머지 부분들의 조직화에 필요할 뿐인, 도시의 중심이 가지는 다소 공허한 이미지’이다. 그의 작품은 덩어리보다는 허의 공간에 중심이 있고, 작품의 방점은 공간을 차지하는 부피보다는 미묘한 표면들에 찍혀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은 시간의 흔적이 보이는데, 그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우주의 경향과 일치한다. 쪼여진 자국들은 파괴적 이화작용을 연상시키며, 시간이 지날수록 둥글게 닫힌 소우주는 해체되어 환경과 하나가 될 것이다. 파여진 정도가 각기 다른 그의 작품들을 동시에 보면, 마치 오래 기간 동안 서서히 진행되는 지각의 변동을 빨리 돌려보는 듯한 움직임이 내재한다. 그의 이번 전시의 작품에서 많이 발견되는 원형은 지상과의 최소한의 접점을 가지면서 자족적인 소우주를 형성하는 모델이다. 그것들은 그 묵직함에도 불구하고 중력으로부터 초월된 존재, 그리고 잡다한 주변 환경으로부터 유리된 자체의 질서가 있는 자율적 존재로 다가온다. 타원은 두 개의 중심을 가지는 원형으로, 직사각형 역시 타원의 변주로 원과 비슷한 안정된 구조를 가진다.

그의 작품에서 역동적 사건은 구조 내부에서 일어나며 점차 바깥으로 향하고, 종국에는 외계로부터 자체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경계도 침범한다. 원은 또한 표면 장력이 있는 액체의 기본 형태로, 외계와의 접면을 최소로 하는 긴장된 형태이며 응집력 있는 구조이다. 이 구조는 내부로부터 잠식되는데, 그 방향성과 정도가 확정되지 않아서 우연성과 비대칭성이 두드러진다. 안정된 외곽선 내부에서 전개되는 움직임은 무질서가 증가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음에 가까운 경직성을 넘어서는 생명 고유의 특성이다. 원의 완전한 이미지는 내부로부터 발원하는 비대칭의 움직임으로 인해, 무기질적 안정감을 벗어나 닫힌 소우주를 분화와 개방으로 이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원이라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구도를 견지하면서도 상징주의로 고정되지 않는다. 다양한 곡면의 끝없는 이어짐, 그 위에 한 겹 더 드리워진 불규칙적인 그물망은 주변과의 연결망을 유지하면서 끝없이 성장하고 움직이는 생명의 특성을 각인한다. 지속적인 구조적 변화를 겪어야 하는 것은 자연 뿐 아니라,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자족적 질서 내부에서 일어나는 동요와 모험이 진화를 이끌며, 이러한 진화는 자연 뿐 아니라, 인간과 예술에 공통된다. 그것들은 공(共)진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는 단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의 작품 속 둥근 외곽선처럼 순환적이다. 인식론상의 구성주의자들은 ‘모든 자기생산적인, 진화하는 체계는 자기 기원으로 회귀하는 능력’(에리히 얀취)이 있다고 한다. 제임스 글리크가 [카오스]에서 말하듯이, 생명을 위해 필요한 조건은 생명 그 자체에 의해, 동력학적 피드백의 자기 유지 과정에 따라 창조되고 유지된다. 모든 조절현상에서 중요한 점은 계의 견고성이다. 즉 그 계가 작은 충격에 얼마나 잘 견뎌내느냐 하는 것이다. 둥근 형태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계에서 견고성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유연성이다. 하나의 운동양식으로 계를 고정하는 것은 변화에 적응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기체는 빠르고 예측불가능하게 변화하는 환경에 반응해야 한다. 건강한 동력학 계는 폐의 가지 모양으로 갈라진 기관지망이나 심장의 자극전달 섬유처럼 넓은 범위의 리듬에 적응할 수 있는 프랙탈 구조를 가진다.

‘부서진 상태’를 뜻하는 라틴어 ‘프랙투스’에서 온 프랙탈(fractal)은 자연에 내재한 불규칙한 모양들에 숨어있는 보편적 규칙을 기술한다. [카오스]에 의하면 프랙탈 차원이란 공간을 채우는 효율을 수학적으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고전 기하학에서 다루는 선분, 평면, 원, 구, 삼각형, 그리고 원추 같은 형태들은 실재를 강하게 추상화한 것이다. 그러나 프랙탈이란 단어를 만든 만델브로트는 구름이 구가 아니라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에 의하면 산은 원추형이 아니다. 번개는 직선으로 내려치지 않는다. 새로운 기하학은 매끄럽지 않고 거칠거칠한 우주를 반영한다. 그것은 구멍이 많고 움푹 파이고 잘리고 꼬이고 서로 엉켜있는 것의 기하학이다. 장성재의 작품 역시 프랙탈 기하학이 암시하는 것처럼, 큰 규모에서 나타나는 구조와 사건을 그가 만든 소우주 속에서 반복한다. 가지들이 높은 효율로 허용된 공간을 채우는 자연의 유기적 형태를 연상시키는 작품들은, 하나의 일관된 과정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자연의 현상과 비유된다. 그의 작품은 연속적으로 파여진 돌의 가장자리에서 무작위적으로 요동친다. 이러한 요동이 일정한 시각 상을 형성하는 장성재의 작품은 수많은 사건들이 굳어 만들어진 구조인 셈이다.